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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 자치 조직의 탄생,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

2022.12.06.

1960년대와 1970년대는 4·19혁명과 반유신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대학생들의 저항 의식이 고양된 시기였다. 서울대학교에서는 4·19혁명으로 학생들의 사상통일과 단체훈련을 위해 조직되었던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1960년 5월 23일 학생 자치기구로 ‘총학생회’가 출범하였다. 당대까지만 해도 서울대학교 합격자 가운데 여학생의 비율은 10~14%에 불과하였으며, 학생 구성에서 남학생들보다 수가 매우 적고 학생활동의 대부분이 남학생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학생들의 활동은 여러 방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총학생회가 출범하게 되면서 여학생들은 기존 학생회와 별도로 각 단과대학별로 여학생회를 조직하고 1960년 6월 3일 각 단과대학 여학생 대표들이 모여 ‘총여학생회’를 구성하였다. 초대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장으로는 법과대학 행정학과 4학년 임옥기가 선출되었다. 총여학생회 회장은 12개 단과대학 학생회장들과 더불어 총학생회에 참여하였다. 1975년 종합화 이전 학생 자치활동은 단과대학 학생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총여학생회는 단과대학 학생회에 준하는 지위를 가졌던 자치 조직으로 기능하였다.

“20년의 연륜을 쌓은 서울대학교는 개교 당시부터 여성에게도 그 문호가 개방되었다고하나 수적인 열세로 인하여 이질적 존재임을 면할 수 없었던 여학생들은 고립성만을 사랑하고 키워왔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관념은 선배에서 후배로 전전되어 내려오는 동안 서울대 여학생의 고정기질로 화해버렸다. 이러한 인습을 깨고 여학생의 권익을 옹호하고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알뜰한 생활을 꾸며보자는 모임이 총여학생회이다.” (“불평은 무관심에서, 여학생회관 시설 미비”, 「대학신문」, 1968.7.1.)

여학생회관, 대학신문, 1972.4.1.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여학생회관, 대학신문, 1972.4.1.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당시 총여학생회는 1학기에 여학생회비 20만 원 정도를 예산으로 책정받았다. 여학생회의 활동으로는 여학생회관 운영, 여성 신생활 운동, 오픈하우스 개최(3월), 신입 여학생 환영 페스티벌(4월), 양로원 방문(6월), 하기 봉사활동(7월), 축제 ‘여울제’ 개최(9월), 그리고 회지 『여울』 간행 등이 있었다. 여학생회관은 1966년 4월에 개관하였으며 동숭동 문리과대학 캠퍼스 옆(혜화동 179의 1호)에 위치하였다. 백여 평 정도의 단층집을 보수 및 증축한 여학생회관에서 여학생들은 임원회의, 회지 편집회의, 동문회 등 단체활동을 벌이거나 개인적으로 휴식을 취했다. 매년 개관일에는 오픈하우스 행사를 열었다. 총여학생회도 학생회와 마찬가지로 매년 여름 방학에 농촌 봉사활동을 이어갔다. 농활은 국민문화연구소와 공동으로 진행하기도 하였는데, 농촌 여성을 대상으로 기술 지도와 교양강좌를 전수하는 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총여학생회는 경기도 용문군, 광주군, 전북 임실군 등으로 봉사활동을 다녀온 후 「결과보고서」와 「농촌실태조사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왼쪽 상단부터 여울제 리플릿(1973), 신입 여학생 festival(연도미상), 제3회 여울제 초대장(1974), 여울제 리플릿(1974)
왼쪽 상단부터 여울제 리플릿(1973), 신입 여학생 festival(연도미상)
제3회 여울제 초대장(1974), 여울제 리플릿(1974)
여울 창간호,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 1968
여울 창간호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 1968

또한 여학생들의 축제인 신입 여학생 환영 페스티벌과 여울제를 개최하여 여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유대감을 쌓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여울제는 1971년부터 열렸는데, 1975년도 종합화 이전까지는 대학축전과 함께 개최되었으나 종합화 이후 1977년부터 대학축전과는 별개의 행사로 개최되었다. 페스티벌, 단과대학별 장기자랑 대회, 행운권 추첨, 강연회 등을 진행했는데, 강연회의 주제는 ‘여성과 역사의식’, ‘우먼파워가 가져오는 도덕적 제문제’ 등 이었다. 총여학생회의 회지인 『여울』은 교수 및 여학생의 연구 논문, 시, 수필 등을 실었고 1968년부터 1974년까지 총 6호를 냈다. 원고는 총여학생회관에서 접수하였으며, 창간호에서는 ‘한국 여대생’을 특집 주제로 다룬 글을 수록했다.

1975년 이전 캠퍼스가 단과대학별로 분산되어 있던 서울대학교의 특수성에 따라 총여학생회보다는 각 단과대학 여학생회에서 여학생회 활동을 더 다양하게 펼쳤다. 치과대학의 경우에는 전국치대여학생모임을 계획하였고 전교생이 여학생인 가정대학의 경우 미용 강좌, 교내 환경 미화 등의 활동을 주로 하였다. 미술대학은 꽃씨 뿌리기, 가면 제작, 파라핀 염색 강습, 라자로마을 방문 등의 활동을 했다. 당시 총여학생회와 단과대학 여학생회의 활동은 대부분 전통적 여성성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현대 여성상’에 부합하는 활동을 중시하였지만, 여학생들은 학원 내 자율화를 위한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서울대 각 단과대학 여학생회장단 및 임원 16명은 16일 오전 11시 40분 종로구 혜화동 여학생회관에 모여 “교련문제가 초래한 학원의 불행한 사태를 개탄하고 그동안 남학생들이 대학의 자유를 외치며 데모에 나서는 것을 보고 일천삼백여명의 여학생들도 그대로 방관만 할 수 없다”고 성명했다.” (“서울대 여학생회장단 「학원수호(學園守護)」 선언”, 「동아일보」, 1971.04.16.)

하지만 총여학생회에서 벌인 각종 여학생 활동은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이 공포되고, 18일 학칙개정안이 대학에 시달됨에 따라 크게 위축된다. 서울대학교는 12월에 학장회의를 개최하여 단과대학별로 「학생회칙 준칙안」을 마련하였다. 준칙안의 내용은 기존의 학생회 조직은 물론 각종 서클들과 과 학회 등 학생자치단체의 활동을 학도호국단 학생회로 일원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학생자치조직을 정부에서 통제하려는 의도였고, 학칙개정안의 여파는 여학생회에도 영향을 미쳐 학생회의 집행부서로 ‘여학생부’가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각 단과대학에는 여학생회 대신 여학생부가 설치되었고 그 연합체로 총여학생부가 구성되었다. 총여학생부는 이전 ‘총여학생회’보다는 위상이 낮아졌으나, 당시 1,500여 여학생들의 대의기관 역할을 맡았으며 총여학생부 활동은 이전의 총여학생회가 벌인 주된 활동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서울대학교 여학생들은 1970년대 유신정권 하에서도 여학생부, 비밀학습서클 등을 중심으로 ‘여성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해왔다. 그 문제의식은 여학생부가 입장문에서 밝힌 “이제까지 학내활동에서 여학생들은 소외되어 왔다”는 것이었다. 대학 내 여학생들은 학생운동의 주류인 남학생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보조자’ 역할에 머물렀고, 이러한 경험은 한국 여성 일반의 문제와 뿌리를 같이한다고 인식하였다. 여학생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대학 내 여성문제 해결을 위해 보다 능동적이고 구체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여학생집단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이하여 학도호국단 대신 학생자치 조직인 학생회가 다시 만들어졌다. 학생회의 부활은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면서 해체된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총학생회의 부활과 함께 총여학생회도 재건되었다. 2월에 열린 학생총회에서 ‘여학생부’를 ‘총여학생회’로 수정하여 총학생회칙 제6장에 삽입하고 7개 단과대학에서 여학생회 구성을 마쳤으며 4월 대의원회의에서 총여학생회장을 선출하였다. 총여학생회장에는 사범대학 교육학과 이재인이 선출되었다. 이전과 같이 총학생회 산하에 여학생부를 두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여학생 활동가들의 문제 제기로 총학생회와 독립된 기구로 총여학생회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1980년 4월 발족한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는 “여성 운동적 차원에서 대학 안의 여성을 조직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생겼다”고 밝혀 1975년 이전의 여학생회나 학도호국단 산하 여학생부와 스스로를 구별 지었다.

서울대 총여학생회 회보 제1호,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 1980, 안애숙 동문 기증

서울대 총여학생회 회보 제1호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 1980, 안애숙 동문 기증


총여학생회는 학내 여학생 이익을 보호하고 나아가 여성운동의 이론적 탐색 및 실천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본 회보에서는 대학인으로서의 역사적 사명이 무엇인지, 총여학생회의 방향성에 대하여 설파했다.
“이제는 과거의 여학생상을 비판·극복해야할 시점에 서 있다. 이렇게 볼 때 총여학생회의 부활은 학도호국단을 포함한 구체제에 대한 도전이자, 지금까지의 여학생들의 부정적 모습에 대한 도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에 본 여학생 대의원회는 총여학생회의 대표로서 자발적 의지를 집약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우리는 학원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모든 대학인과 함께 학생회 부활의 입장을 적극 지지한다.
2. 유신잔재를 비롯하여 학원을 억압하려는 모든 세력을 단호히 거부하며 이에 전면 투쟁한다.
3. 우리는 여학생 스스로를 억압하는 무사 안일주의를 배격하고 전 여학생들의 주체적 대학인으로서의 각성을 촉구한다.
4. 학원 내에서의 모든 성적차별주의는 기존의 지배구조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배격한다.
5. 참된 여성운동의 방향을 오도하는 기존의 관제, 어용, 무능 여성운동을 배격하며, 그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6.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모든 대학인과 더불어 용감하게 투쟁한다.”

1980년대 총여학생회는 이전과 달리 전투적인 사회변혁 운동을 수행하고자 했다. 총여학생회는 1972년부터 1979년도까지 7회 동안 개최되었던 여울제를 폐지하였다. 또한 『여울』이 가진 교양 오락지의 성격을 지양하고 한국적 역사 현실과 민족의식 속에서의 가치관을 재조명하는 성격으로 탈바꿈한 기관지 『여론(女論)』을 월보 형식으로 발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문교부는 학생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기존의 학도호국단 조직을 개선해 유지하기로 결정하여 학도호국단 산하 학생회도, 총여학생부도 그대로 존치되었고 이후 5·17군사정변에 의해 총학생회와 함께 총여학생회도 해체되면서 『여론』을 창간하는 사업도 난관에 부딪혔다. 결국 『여론』은 1983년이 되어서야 학도호국단 여학생부의 이름으로 비로소 창간호를 낼 수 있었다.

여론 창간호,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발행,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여론편집위원 편집, 1983

여론 창간호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발행,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여론편집위원 편집, 1983


여론편집실은 “여성과 대학인이라는 존재에서 비롯되는 제문제에 대하여 여학생 언론지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여, 이 땅의 여성으로서 요구되는 과제를 실천해나가는 창조적·발전적 상의 정립을 위한 초석이 될 것”을 다짐하면서 출발하였다. 창간호에서는 특집 「한국여성의 현황」을 비롯하여 모두 12편의 글을 실었다.
“이제 우리들의 주관심사로 되고 있는 여성문제는 인류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고, 우리는 여성문제의 해결이 궁극적인 인간해방에 이르는 길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본다.” (〈특집〉 한국여성의 현황)

1981년부터 인문대학, 사범대학 등 5개 단과대학에서 여학생만의 공개 서클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하여 1984년 9월 27일에는 총학생회장 직선제 시행과 함께 총여학생회를 부활시켰다. 회장으로는 단독 출마한 장은주(식품영양학과 4학년)가 당선됐다. 이날 교내 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 ‘학생회부활기념식’을 가졌으나 학교 측은 학도호국단을 제외한 일체의 다른 기구를 학생대표기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함에 따라 계속되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총여학생회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총여학생회장은 「애국시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반정부 유인물을 제작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으며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제명된 학생대표들에 대하여 총학생회와 함께 철야농성에 돌입하여 “제명조치 철회, 학원 사찰 중지, 학생회 인정”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우 어패럴 노조 탄압사건에 대하여 여성 노동자의 생존권 문제와 성차별 문제를 제기하는 등 민중 여성문제와 가부장제의 비민주성을 혁파하기 위한 목소리를 냈다.

기호2 서울대 총여학생회장 후보 김혜란: 민중과 함께 민주를 위하여 투쟁하라 여성이여, 1985
기호2 서울대 총여학생회장 후보 김혜란: 민중과 함께 민주를 위하여 투쟁하라 여성이여, 1985
1985년 총여학생회장 선거 포스터이다. 기호 2번 김혜란의 공약으로는 “1. 민중여성문제연구위설치, 2. 기층여성과의 만남의 장 확보,
3. 여학생축제 활성화, 4. 여성인권유린에 적극 대처”를 내걸었다.

1985년 1월 문교부는 학도호국단의 폐지와 학생회의 부활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학생회 재건의 전제 조건으로 ‘문교부 5원칙’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당시 자율적인 학생회 구성을 염원하던 대다수 학생들의 의사와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1985년 2월 19일 ‘총학생회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3월 4일 개강을 맞아 자체적으로 학생회칙 시안을 마련하여 학교와 조정 작업을 가졌다. 그러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학생들은 단과대학 학생회 구성을 마치고 총학생회 구성에 착수하여 3월 28일부터 4월 3일까지 총학생회장을 뽑기 위한 합동 유세를 열었고, 마찬가지로 4월 3일까지 진행된 총여학생회장 선거에서 이진순(사회학과 4학년)을 선출하여 총여학생회를 구성했다. 4월 선거로 구성된 총여학생회는 학도호국단 내 여학생부와 달리 학생 사회 속에서 여학생들이 주체로 들어설 수 있는 여성운동단체 역할을 하였다.

삼민여성 창간호, 1985,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
삼민여성 창간호, 1985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
해방 제2호, 1985,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 홍보부 해방사
해방 제2호, 1985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 홍보부 해방사

1986년 9월 6일 총학생회장 및 총여학생회장 선거에서 총여학생회장으로 송선경(화학교육과 4학년)이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하지만 총여학생회는 동아리들이 정리될 때 다시 총학생회 산하의 여학생부로 흡수되었다. 학생운동의 모든 역량을 학생회에 집중하고 있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총여학생회를 별도로 운영하기엔 힘에 부쳤기 때문이다. 이는 학생운동이라는 대의를 위한 문제 해결에 집중된 결과였다. 여학생들은 1987년 6월항쟁 직후 곧바로 총여학생회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에 착수하여 1989년 3월 기존의 총학생회 집행부였던 여학생부를 총여학생회 건설준비위원회로 전환하면서 총여학생회를 발족하였다. 재건 1대 총여학생회장에는 서현주(서어서문학과 4학년)가 당선되었다. 총여학생회가 총학생회 산하 여학생부에서 독립돼야 한다는 이유로 “여성문제는 총학노선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내용”이며 “여학생부의 경우 다른 집행부와의 연계점을 찾기 어려운 점” 등을 들었다. (“오는 12일 총여학생회 선거 –여학생들 무관심이 문제점으로 지적-”, 「대학신문」, 1991.4.1.)

1990년 재건 2대 총여학생회 회장은 이정희(공법학과 4학년)였다. 이 시기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는 서울 27개 대학 총여학생회로 구성된 협의회인 ‘서울지역여대생대표자협의회’에 참여하고 ‘한국여성민우회’ 등 여성운동단체와 함께 여학생운동의 활로책을 모색하며 노동문제와 더불어 많은 여학생들의 권익을 주장했다. 매년 ‘관악여성학교’와 ‘작은 여성학교’를 열어 여성문제를 주제로 한 강연을 개최하고 여성학 강좌 개설을 위해 여성학 시범강좌를 진행하였으며, 취업 차별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대학 내 성추행 대책 마련 촉구 활동과 성추행 신고창구를 마련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겨레의 딸들이여! 사천의 다짐모아 여성자주화의 새아침으로 진군하자!, 총여학생회장후보이정희선거운동본부, 1990.

겨레의 딸들이여! 사천의 다짐모아 여성자주화의 새아침으로 진군하자!
총여학생회장후보이정희선거운동본부, 1990.


재건 2대 총여학생회장후보 이정희 선거운동본부 자료집이다. 본 자료집에서는 ‘여성운동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여학생 운동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구속 동지 구출 투쟁에 대하여’, ‘취업 차별 철폐 투쟁에 대하여’ 등 총 4편의 글을 실었다. ‘여학생운동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에서는 여학생운동의 발전을 위하여서는 “여학생운동의 대중화와 지속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대중조직을 건설하는 것”과 “여학생운동 독자의 강령적 요구를 명확히 정식화하는 것”, “여학생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고 있는 간부를 준비하는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어렵게 이어져온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는 1993년 들어 회장 후보가 나오지 않아 결국 폐지되었다. 그간 총여학생회는 많은 질곡을 겪어왔는데, 특히 학생들의 무관심과 여학생회의 필요성에 대한 낮은 인식이 총여학생회가 지속되기에는 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여학생들의 참여 저조로 인하여 투표율은 늘 과반수에 겨우 웃돌 정도로 낮았고, 1991년 총여학생회장 선거는 낮은 투표율 때문에 기한을 연장하여 진행하였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폭발적 열망 속에 여학생들은 총여학생회를 중심으로 역량을 쌓아 대학 내 민주주의 투쟁을 주도했고 여성해방투쟁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총여학생회 활동의 결과로 여학생들은 ‘보조’에서 ‘주체’의 위치로 바꾸어 설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 총여학생회는 전체 학생 운동 내에서 여성문제의 독자성을 내세우기 어려운 부차적 위치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총학생회만큼의 제대로 된 위상을 갖지 못했다. 그 결과 총여학생회는 여학생 활동가들의 분투에도 지속되지 못하였고, 이후 여성운동은 관악여성모임연대의 형식으로 ‘반성폭력 운동’을 전개하는 방향으로 확대되면서 본격적으로 젠더 권력 차원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50년사』, 1996.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도약의 나래를 펴라 1975-2017』, 2017.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 통계연보 제1집』, 1962.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 통계연보 제23집』, 1984.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1권 시대사』, 한울, 2020.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2권 사회문화사』, 한울, 2020.
정다울·이나영, 「대학 여성운동을 역사화하기 - 대학사회 및 한국 여성운동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 『사회학연구』28(1),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20.
서울대저널, http://www.snujn.com/news/3000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신문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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